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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복교복 입은 진주 삼현여고

경향신문 1999.10.27 보도 자료

진주 / 글 차준철.사진 권혁재 기자

연두 저고리에 밤색 치마. 베이지색 저고리에 자주 치마. 경남 진주 삼현여고 교정은 언제나 화사하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잔디밭 운동장이나 화단가에 삼삼오오 모여서 재잘재잘 웃음 짓는 소녀들. 각자 맘에 드는 색깔을 고른 색색가지 생활한복을 교복으로 입고 있다.

생활한복을 교복으로 입은 지 두해째. 우리나라 학교 중에선 처음이다. 학생들도 이젠 한복이 편하다. 다른 학교 아이들에게 부러운 시선을 받는 것도 즐겁다. 길에서 만나는 어른들은 곱고 참해 보인다고 칭찬해준다. 『 교복 입고 미팅 나가면 50점은 따고 들어가요.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느끼게 됐어요. 올봄 서울 수학여행길에 경복궁에 들렀을 때는 최고로 기분 좋았어요. 주위 어른들이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이렇게 예쁜 교복은 처음 본다」고 하셨거든요』(2학년 박한나)

불편한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치마가 길어서 버스나 학교 계단을 오르내릴 때 더러 밟히기도 한다. 옷차림이 워낙 눈에 띄다 보니 오락실에도 맘놓고 갈 수 없다. 하지만 늘 몸가짐을 바로잡아 「공주」처럼 단정하게 걷고, 어른들이 걱정하는 「나쁜 짓」도 저절로 하지 않게 된다.

『 불편하다고 생각하면 못입어요. 교복을 안입다가 양장 스타일로 입기 시작했을 때도 처음엔 어색했을 게 분명해요. 생활한복이 어색해 보이는 것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에요』(2학년 남유향)

생활한복 교복 입기를 처음 제안한 이는 이 학교 최문석 교장(58). 교복자율화 당시부터 교복 무용론을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나 교복 착용을 건의하는 학부모들의 의사를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획일적인 옛날식 교복은 내키지 않아 생활한복에서 대안을 찾았다. 입학식이나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에만 보던 학생들의 고운 한복 자태를 떠올린 것이다.

생활한복을 교복으로 채택하기까지 꼬박 1년여가 걸렸다. 그만큼 준비를 철저히 했다. 학교에서 교복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학생들 스스로의 판단에 맡기고 싶었다. 학생.학부모.교사 12명으로 교복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우리 옷이 교복으로 가능한지 세밀하게 조사했다.

우리 문화와 우리 옷을 주제로 한 강연회와 공청회도 수차례 열었다. 지역 한복업체 전체를 대상으로 교복 디자인을 공모하고 패션쇼를 거쳤다. 최종으로 선정된 교복은 춘추복 3종류, 동복.하복 각 1종류. 학생들이 원하는 색깔을 골라 입게 해줬다.

남들처럼 하면 되는데 굳이 튈 필요가 있느냐고 반대하는 학생이나 학부모도 있었다. 그러나 직접 입어본 학생들이 한복의 좋은 점에 눈을 뜨고 학교측도 학부모들을 꾸준히 설득해 멋진 우리옷 교복을 입힐 수 있었다.

삼현여고에 이어 올해부터 생활한복 교복을 채택한 학교가 세곳 더 늘었다. 부산 가야고, 안동 성창고, 서울 국악예고. 이들 학교에서는 아직 초창기라 학생들의 찬반 양론이 엇갈린다. 거리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게 한복 교복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 하지만 뜻깊은 시도라는 점에는 모두 공감하고 있다. 삼현여고의 출발은 교복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선택의 폭을 넓혔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cheol@kyunghyang.com

교복의 변천사

이화학당 치마.저고리가 효시

우리나라 최초의 교복은 한복 치마 저고리였다. 1890년 이화학당 학생들이 러시아제 붉은 목면으로 똑같은 치마 저고리를 만들어 입은 게 효시다. 1900년대 초에 등장한 남학생 차림은 짧게 깎은 머리에 학생모자를 쓰고 바지 저고리 위에 오버코트나 망토를 입기도 했다.

일제 때 세일러복.양장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교복이 양장이나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1910년 양장 교복의 선두였던 숙명학교가 원피스 교복을 자줏빛 치마 저고리로 바꾸기도 했지만 1930년대에 들어 일제의 강요로 다시 양장 교복을 입혔다. 그때부터 여학생 교복은 세일러복과 블라우스, 스커트, 스웨터로 굳어졌다. 남학생 옷은 일본식으로 변했다. 검은색이나 회색 옷감으로 스탠드 칼라에 단추가 5개 달린 저고리. 이런 형태가 80년대 초까지 50여년간 우리 교복의 모습으로 고정됐다.

해방 뒤에도 일본식 그대로

세월따라 유행따라 청소년의 평상복은 끊임없이 변화했지만 교복은 여전히 권위적이고 딱딱한 일제시대 모습을 고수했다. 그때문에 청소년들의 거부감이 대단했고 졸업식 때 교복에 밀가루를 던지고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풍속을 낳기도 했다.

83년 교복자율화시대 열려

1980년 대 이후는 개성을 추구하는 다양화시대. 사실상 교복 폐지를 선언한 83년 「교복자율화」 조치가 도화선이 됐다. 학생들에게 개성을 찾게 해줬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충분한 준비 없이 시행한 탓에 사치, 위화감 조성 등의 문제를 낳았다.

사치.위화감, 부활하는 교복

교복 부활의 여론이 높아지면서 문교부는 86년 2학기부터 교복 재착용 여부를 학교장 재량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후 교복을 다시 착용하는 학교 수가 급증했고 현재 98% 정도의 학교가 교복을 입고 있다.

(최종 편집: 1999년 10월 28일)